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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의식족이지예절(衣食足而知禮節)이라 했다.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생활이 궁핍하면 예절을 차릴 여유가 없다. 사람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예절을 갖출 수 있다. 체면을 차리고 염치를 차릴 수 있다. 이런 뜻이니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에 점점 더 큰 의문이 생기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의식족이지예절이라는 언명 또는 원리에 관한 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 같다.
염치는 매우 중요한 인간속성이다. 염치라는 속성이 인간생활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퇴화(退化)해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먹고 사는 게 풍족해진 풍요사회에 살게 되면서부터 역설적이게도 염치라는 인간속성이 퇴화의 길을 빠르게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짙게 든다. 사회 전체의 몰염치세태가 걱정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국가의 거버넌스체제를 구성하는 중추세력들의 염치퇴화가 유독 더 두드러져 보인다.
나라의 거버넌스를 이끌어가는 세력들의 염치상실행태에 주목하고 몰염치사회의 민주질서 파행을 이 책의 주제로 삼아 약간 긴 글을 썼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학계를 향해 거버넌스 연구의 염치론적 접근방법을 제안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책을 학술서적의 기준에 맞춰 꾸미지는 않았다. 당초부터 서술방식을 대중화하려고 노력했다. 누구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희대(稀代)의 몰염치풍조를 바라본 사람이 후대에 남기는 비망록이기도 하다. 정관계의 견디기 어려운 몰염치를 비판하다 보니 질책하는 어조(語調)가 강해진 점 독자들이 양해하기 바란다.
몰염치사회의 민주주의라는 이 책의 중심주제에 대한 논의에 이어서 그에 무관하지 않은 몇 가지 이야기를 더해 이 책의 편제를 완성했다. 추가로 선택한 몇 가지 이야기란 공평사회화운동, 민원행정과 정부규제, 엽관주의, 모방적 제도개혁, 직업세계의 변화, 저출산 문제, 대학의 문제, 정보기술의 통제 등 정치적?행정적 의제들을 말한다. 이런 추가적인 이야기들도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기 바란다.
“공평사회로 가는 길을 헤맨다”라는 제목 아래서는 우리사회에서 확산되어온 공평사회화운동의 과유불급을 비판하고 올바른 진행방향을 논의하였다. “와라가라 행정의 청산”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우리나라 민원행정의 문제, 특히 방문민원의 문제, 그리고 민원사무 발생의 배경 내지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행정규제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다시 한 번 엽관주의에 대하여”라는 제목 아래서는 엽관주의라는 인사행정 용어에 대한 정부 내외의 이해부족에서 빚어지는 혼란과 불필요한 논쟁을 비판하고, 통일적이고 표준화된 용어사용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개혁과 모방: 미국 CSC와 FBI의 모방”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개혁의 여러 접근방법과 모방적 개혁의 개요를 설명하고 모방적 개혁의 과오를 지적하였다. 과오의 사례로 미국 연방인사위원회와 미국 연방수사국을 벤치마킹한 모방 또는 모방계획을 들어 설명했다. “직업은 짧고 인생은 길다”라는 제목 아래서는 사회발전에 따라 유동화되고, 수명은 짧아져 가는 직업들의 변화추세, 그리고 빠르게 늘어나는 인간수명의 변화추세를 살피고, 그 사이에 끼인 사람들의 적응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저출산의 원인을 헤아려본다”라는 제목 아래서는 우리나라에서 생
각할 수 있는 저출산의 원인들을 두루 살폈다. 미시적 원인보다 거시적 원인의 고찰에 더 많은 역점을 두었다. “대학의 영욕”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오늘날 우리 대학들이 겪게 된 어려움, 그리고 대학의 신망저하를 조장하는 원인들을 살펴보았다. “인간과 인조물의 대결”이라는 제목 아래서는 인간이 만든 인조물의 부작용과 해독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였다. 특히 AI로 대표되는 첨단정보기술이 인간의 뜻을 거역할 수 있는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기술이 인간에게 해코지를 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국가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민주주의는 염치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원리이다. 염치가 빠진 민주정치는 타락한 정치이며 가장 취약한 정치이다. 우리 사회, 우리 정치가 염치라는 유실물(遺失物)을 되찾지 못하면 우리 민주주의의 앞길은 점점 더 암울하고 험난해질 것이다. 국민적?국가적 염치회복은 진인사대천명의 문제이며, 국운에 달린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