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쓰기도 일종의 살풀이인데, 사실 여행이나 씀을 통해서—이 기묘한 살풀이를 통해서—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생은 단계별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슬픔이나 울분이나 딱히 어떻게든 홀가분하게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생이란 건 차곡차곡, 한 줄기의 명확한 계단처럼, 혹은 일자로 죽 이어지는 트랙의 형태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생이란 것에 어느 정도 단계가 있기를 소망했다. 그런 식으로 사고하면 어떤 슬픔이든, 종착역으로 향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역이 되기 때문이다. 종착역이란 게 죽음에 대한 적확한 은유는 아니다. 실은 정체도 불분명한 그 종착역을 위하여, 그 미지의 성취를 위하여, 나는 내 슬픔들이 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일종의 낮은 계단이기를 바랐다.
― 에세이 「슬픔에 관한 소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