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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남정찬

출생:1580년

사망:19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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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지역 고전학 총서 3차 세트 - 전6권>

남정찬

본관은 의령, 자는 덕주(德柱)·문찬(文贊), 호가 니산(尼山)이다. 그의 선조들이 영남에 터를 잡게 된 것은 남간(南簡)의 현손인 남진(南振)이 삼가 두심동에서 내려오면서부터다. 남진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재종숙 남효온(南孝溫)에게 글을 배웠는데, 갑자사화 이후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이후 남주(南宙)가 임진왜란 뒤에 의령으로 옮겨 거주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판곡리에 대대로 거주하게 되었다. 남주의 손자 남붕익(南鵬翼)은 문학으로 뛰어났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증손 남두장(南斗章, 남정찬의 증조부)은 근면으로 가업을 일으켜 후손들에게 넉넉한 경제적 기반을 물려주게 되었다.
남정찬은 남낙원(南洛元)과 현풍 곽씨[곽성수(郭聖洙)의 딸]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고, 백부 남귀원(南龜元)에게 입후했다. 14세(1863)에 〈신안서사부〉를 지었으며, 21세(1870)에 장남인 남창희(南昌熙)가 태어났다. 24세(1873)에 이정모(李正模) 및 향중 선비들과 주희의 향약을 전범으로 하는 향약계를 맺었다. 32세(1881)로 삼가현 감시를 거쳐 1882년(고종 19) 서울 회시에서 합격했다. 이로써 성균관에 입학해 대과 준비를 할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향리로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36세(1885)에 본생부 남낙원을 모시고 삼가현 묵동리로 이주했다. 당시 삼가에는 정면규(鄭冕圭)가 은거해 강학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농산과 학연을 맺고, 삼가의 선비들과 교류했다. 37세(1886)에는 유행병이 돌아 모부인 이씨, 생모부인 곽씨, 부인 곽씨가 연달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40세(1889), 계배 재령 이씨[이유수(李有秀)의 딸]와 함께 의령 판곡리 옛집으로 돌아왔다.
43세(1892)에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어 다시 서울에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의령으로 돌아왔다. 의금부도사직을 사직한 뒤로 남정찬은 집 뒤에 따로 건물을 지어 도잠의 유명한 시 〈음주〉의 ‘유연(悠然)’의 뜻을 취해 ‘유연정’이라 편액을 하고 도잠의 삶에 뜻을 두었다. 이후, 51세(1900)의 나이로 의령 집에서 졸해, 유연정 동쪽 발니산에 묻혔다. 남정찬의 원배는 현풍 곽씨로 2남 3녀를 두었으니, 아들의 이름은 각각 창희(昌熙)·태희(台熙)이고, 세 딸은 각각 신영직(辛泳直)·권재채(權載采)·권재달(權載達)의 부인이 되었다. 계배는 재령 이씨로 3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의 이름은 기희(箕熙)·두희(斗熙)·필희(畢熙) 등이고, 두 딸은 각각 김규형(金奎馨)·노기렬(盧琪烈)의 부인이 되었다. 모두 5남 5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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