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면서 즐거웠습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영상이 정겨웠으니까요. 이 글을 책으로 내놓아야 할지 결정할 때는 한참을 망설여야 했습니다. 세상에 필요치 않은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요.
소설은 2020년 6월부터 쓰기 시작했습니다. 5년, 어딘가의 꼭대기에서 어딘가의 바닥으로 널뛰기하던 시절이었어요. 찰과상, 자상, 타박상, 교상, 열상 등, 온갖 종류의 상처에 아파하다가 한 번씩 단맛을 보았습니다. 단맛이라 해봐야 샐비어 꽃-대롱 하나 정도였을 겁니다. 그래도 그간의 동통(疼痛)을 잠시 잊게 도와주었음은 분명합니다. 단편소설 한 편, 그것도 초고를 써놓고 자만에 빠졌다가, 퇴고 과정에서 무수히 머리칼을 쥐어뜯고, 탈고를 마쳤다고 뿌듯해하다가, 아직 멀었다는 깨우침에 또 좌절하는 과정을 이어갈 수 있었으니까요. 지금도 똑같지만, 아마 영영 이 운명의 폐곡선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함은 늘 안고 삽니다.
어쩌다 한 번씩 소설 쓰는 법을 잊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머리가 텅 빈 느낌에, 다음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앞 단락과 뒤 단락의 연결, 호응·반전의 흐름이 떠오르지 않는 거죠. 방법은 딱 하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설을 읽는 거예요. 단편 한 편에 깨달음이 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한 번 책을 잡으면 끝까지 다 읽게 되더군요. 그렇다고 깨우침이 오래가는 것도 아니에요. 얼마 가지 않아 또 멍한 상태에 빠지는 일이 또 오니까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물어보니 글 쓰는 분들이 대충 다 비슷하더군요. 그래서 안심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소설을 더 많이 읽게 됐습니다. 잘 쓰려면 잘 쓴 소설을 많이 읽어야 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유려한 문체의 소설, 심오한 철학을 품은 소설, 깊은 사유에 빠져들게 하는 소설 등, 훌륭한 소설은 너무 많습니다. 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복잡다단하다고 해도 소설과 우리의 삶은 묘하게 거리가 있답니다. 어느 순간 내 삶의 얘기와 비슷한 듯 느껴져도 내 삶은 절대 아니에요. 공감하고 울고 웃지만 어디까지나 우린 관찰자일 뿐입니다. 소설 속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까요. 이런 소설, 저런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이왕이면 즐거운 소설을 쓰자고요. 너무 비참한 얘기, 슬픈 얘기, 더러운 얘기는 피하겠다고 마음먹은 겁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이거예요, 그냥 아름다운 얘기. 그렇다고 마냥 미려하거나 그냥 우스꽝스럽기만 한 소설은 아니랍니다. 뭔가 부족한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나누고 행복을 찾는 얘기죠. 진흙 속에 핀 꽃이 더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욕정에 사로잡혀 시작한 동거, 계획이 없으니 당연히 불안할 수밖에 없는 미래를 안고 사는 젊은 남녀의 동거 얘기죠. 절약 정신, 월세를 아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남녀가 옥탑방에 세 듭니다. 싼 대신 옵션이 있어요, ‘전대미문의 옵션’이죠. 늙은 개를 돌봐야 하는 셋방이라니! 그럭저럭 이야기는 앞으로 갑니다. 개가 죽고 길고양이가 뛰어들고, 다문화가정의 아이, 아동 학대로 고발된 선생님, 부모의 이혼으로 떨어져 나온 자매, 실명에 다다른 아내와 사는 중년남, 카페 사업이 망해서 은둔형 외톨이가 된 바리스타에 역술인까지 등장하죠. 젊은 남녀의 사랑은 애처로워요. 그러나 끝내 행복을 찾는답니다.
사회문제를 담고 있지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요. 이렇게 살면 어떻겠냐는, 다들(동물까지) 행복해지지 않겠냐는 소박한 주제가 들릴락 말락 흐를 거예요, 3월의 시냇물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