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IMF 시절에 열 살 안팎의 어린 남매가 어느 빌라에 버려져 있다가 일주일 만에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 뒤 가족관계증명서로 주민등록 시스템을 바꾸면서,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도 몰랐던 이 아이들의 부모들이 드러났다는, 그래서 그 아이들이 그나마 받고 있던 사회 지원을 못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어쩌다 보게 된 뉴스인데도 잊히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이십 대가 되었다.
이십 대가 된 그 아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들렸다. 심플하게 생각하고, 재미를 쫓고,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일컬어진다는 이십 대. 그 아이들이 겪는 무기력함이, 희망을 본 적조차 없어, 절망조차 없는 이십 대 아이들의 갑갑함이 나를 매번 미안하게 만들었다. 92년 정태춘이 피로를 노래한 이후 여러 이유로 지친 오십 대의 시민운동가들이 외상 장애처럼 화를 낼 때, 나는 길고양이처럼 버려진 이십 대를 생각했다.
마음이 술렁이는 일이 싫어 순수소설을 안 읽은 지도 꽤 오래되었다. 이십 대가 쓰는 장르 소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엄마라서 미안했다. 이 세상 이십 대의 절반은 너무 많이 알고, 너무 똑똑하고, 자식보다 본인의 자아실현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신의 엄마를 증오했다. 자신은 엄마만큼 살지 못할 게 뻔해서. 엄마가 기억하는 이십 대의 열정을 본 적조차 없어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그런 엄마조차 본 적이 없었다. 버려졌거나 생계비를 버느라 바빠서 자식을 투명 인간처럼 만들었다.
나는 너무 바쁘거나 너무 시간이 많아서 무력한 이십 대를 보며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있는 칠십 대를 떠올렸다. 전쟁 직후 폐허에 태어난 그들과 지금의 이십 대가 가진 특이점이 뭘까, 다른 점은 뭘까. 그들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증오가 불발탄처럼 세상에 흩어져 있었다. 부모가 된 그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이 낳은 자식을 죽이고 있다는 데 나는 이 아이들이 짐승이 된 일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느 건축가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모두 소거했더니, 건축가라는 직업이 남아서, 그래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웃고 말았다. 내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일을 쫓으면 어느 때는 자신이 싫어하는 일도 해야 했다. 그런데 싫어하는 일을 소거하고 나면 인생이 심플해졌다. 그런데 그 일은, 죽도록 심심한 인생이 정말은 행복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인생을 스스로 괴롭혀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우리의 이십 대는, 자신의 의지 없이, 자신에 대한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심심한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길고양이 같은 이십 대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생각했다. 그렇게 십 년이 지나고 몇 편의 소설이 완성되었다.
이제, 부채(負債)와 같은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다. 잘하는 일인지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