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쓰기도 일종의 살풀이인데, 사실 여행이나 씀을 통해서—이 기묘한 살풀이를 통해서—다음 단계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생은 단계별로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슬픔이나 울분이나 딱히 어떻게든 홀가분하게 졸업할 수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생이란 건 차곡차곡, 한 줄기의 명확한 계단처럼, 혹은 일자로 죽 이어지는 트랙의 형태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생이란 것에 어느 정도 단계가 있기를 소망했다. 그런 식으로 사고하면 어떤 슬픔이든, 종착역으로 향하기 위해 스쳐 지나가는 역이 되기 때문이다. 종착역이란 게 죽음에 대한 적확한 은유는 아니다. 실은 정체도 불분명한 그 종착역을 위하여, 그 미지의 성취를 위하여, 나는 내 슬픔들이 생의 다음 단계를 위한 일종의 낮은 계단이기를 바랐다.
― 에세이 「슬픔에 관한 소회」 중에서
가장 최근에 다이빙을 다녀온 바다는 동해다.
언젠가 코론 바다에 다시 가고 싶다.
그 아름다운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건 좋다. 기록하는 것도.
안산과 서울과 발렌시아에 거주했을 때
그 도시의 타투이스트들에게 문신을 받아 왔다.
그중 왼쪽 손목의 문신은 흉터 커버업이다.
흉터를 새긴 건 이제 꽤나 오래된 일이고
그동안 내 인생에는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
죄다 무의미하고 별 볼 일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하나하나 다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섬은 대단했다.
그 바다는 대단했다.
그 밤바람은 대단했다.
그 사랑은 대단……까진 아니고 뭐 나쁘지 않았다.
그 우정이 정말로 대단했지.
여전히 대단하고. 영원히 사랑하고.
나는 나의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다.
혹은 나보다 더 어린 존재들을 위해.
혹은 슬픔 때문에
어린 존재들보다 더 어려진
어떤 지친 이들을 위해.
내가 대단히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 사랑의 총량은 매우 미미하고
나는 황폐한 내면과 매일 싸운다.
속절없이 소심해지거나
사람들에게 벽을 치는 날도 많다.
그럴 때면 내 곁에는 책과 고양이♡밖에 없다.
[……]
내 소설들이 읽히고, 조율되고, 비행하고, 관측되던 몇 달의 시간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간절히 꿈꿔온 순간이었다.
책이 출간된 후에도 두 선생님의 정비와 트래킹은
고모의 편지가 되어
A의 훈련이 되어
나를 수영장 물에 빠뜨리고
드넓은 밀밭을 정신없이 달리도록 만들 것이다.
지금으로선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날에도 나는 쓰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까지 늘 그렇게 살아왔다.
이 생이 단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매일 멍청이처럼 웃을 수도 있겠지.
믿기지 않는 슬픔도 무작위의 불안도 잘 어르고 달래서
자부할 만큼 고요히 단단히 살아갈 수도 있겠지.
이 땅에 내 의지로 태어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 어린 것에게 가능한 한 천진한 미래를 주고 싶다.
낙관의 끝이 비관이듯
비관의 끝은 낙관.
(무한 반복!)
이것이 내가 붙들고 사는 생의 진실이다.
2024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