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문
이 저술이 독자님들의 삶에 작은 울림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16년이라는 긴 여정 속에서 저를 빛으로 인도하신 주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이 책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미션 스쿨을 섬기며 전체적인 미션 과업에 함께해 주신 데 감사합니다.
아내와 아들 신환과 딸 에스더와 사위 프랑수아 티소(Francois Tissot) 그리고 손주들 에단과 야엘하선에 이르기까지, 아신대학교의 라틴선교연구원과 교단의 총회선교부(kpm) 그리고 이를 가능하도록 이끌어준 고신·신대원 36회 후원 동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여기 평론의 원고 파일들을 문학지의 <특집>에 게재했던 최세균 발행인(『계간 상록수』)과 박영률 발행인(『계간 사상과 문학』)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분주한 시간을 나눠 방대한 분량을 꼼꼼히 읽어 첫 독자가 되어주신 한국·라틴아메리카학회장 우석균 교수(서울대학)와 서평을 써주신 임상래 교수(부산외국어대학 스페인어과, 중·남미지역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정을 보아주신 창조과학회의 허성욱 박사님, 그리고 파라과이 장로교신학대학교의 박중민 이사장님께도 감사합니다.
더욱이 편집과 인쇄와 장정裝幀 일체에 협력하며 출간하기까지 동반해주신 새한기획사 민병문 사장님과 새한 편집 실장님, 동역자님의 사랑에 대한 감사를 잊지 못합니다.
파일을 풀어내고 원고 정리까지 섬겨준 GMTI 사무총장님과 라틴 대륙의 여러 선교사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필자의 번역과 서술에 대해서는 국내외 스페인 어문학과 선후배 제현님들과 독자들의 지도편달을 달게 받기로 청하며 인사말에 갈음하고자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2026. 7. 저자 올림
라틴선교교육 연구실에서
머리말
유럽과 북미 대륙 간의 애정 없는 결합에서 태어난 라틴아메리카. 출발부터 모순의 대륙이었다. 좋을 때는 친자로 맞이하고 궂을 때는 서자 취급을 받은 땅이다. 16세기 초엽 수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스페인 군대의 총칼에 희생당했던 역사는 주지의 사실이다. 한때, 낭만적 이상주의와 영웅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제2의 파리 건설을 외쳤던 유럽의 이민자들은 북부의 시몬 볼리바르와 남부의 산마르틴 장군 영도 아래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독립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치구조와 혼합문화를 갖고 있다. 그 어떠한 기본 틀에도 적용시키기 어려운 다인종 사회계층을 이룬 황당한 대륙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아메리카는 대동소이한 히스패닉 문화를 형성했다. 다른 대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스페인어권의 소통이 상호 독특한 방식의 응집력으로써 영위해 왔다. 이러한 희귀한 장점이 대륙 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받아놓은 당상堂上처럼 각 장르를 기대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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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라틴아메리카 내 6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5개국)을 다룬다. 더구나 6인 외 5개국 문호 6인을 더 탐구한 결과물이다. 모두 10개국에 연결된 문학기념관 방문에 의한 자세한 기행문인 동시에 12인 작가들의 대표 작품들에 나타난 스페인어 문학 평론과 작품의 분석을 소개하고 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여러 감동과 실험적 글쓰기가 라틴아메리카 대륙을 스쳐 지나갔다. 필자의 강조점은 이 책 안에 호흡하고 있는 라틴권의 문호들 가운데 어느 한 작가도 세계 선교와 무관한 작가가 없다는 소신에 있다. 나는 그런 점에 고무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틈틈이 수정했다. 첫 번째 연구를 시작했던 우루과이의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로부터 마지막 브라질의 ‘조르지 아마두’(Jorge Amado)에 이르기까지 합하여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 이 책의 출간이 늦었을는지도 모른다. 여기 소개되는 어느 한 나라도, 어느 한 작가도 필자의 선교 의지에서 벗어난 경우는 없다. 그 나라와 문호들이 무덤을 열고 지상에 걸어 나와서 나와 함께 선교사역을 벌였다는 뜻이 아니라, 선교적인 활동 안에 고맙게도 그들이 들어와 주었다. 안데스산맥을 종횡으로 옷감을 짜듯 작품들의 분석에서 조견早見되는 ‘문도 노비시모’(Mundo-novisimo)의 삶과 창작에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더구나 자민족적 사고방식을 가까이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출간을 성사시킨 간증이며 고백이다.
문학기행문에 관해서는 자부할만하게 나눌 말이 적다. 읽기만 해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썼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어디를 보아도 관광가이드 방향이 아니기에 흥미로운 기사거리를 제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독자님들께 필자의 본래 방문이나 실제 행보가 아니었으므로 양해를 구할 따름이다. 각 단원 첫 장마다 문호들이 속한 국가와 문학박물관(기념관) 방문 지도를 제작해 그려 놓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혹은 다른 비평 분야에서의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가독성에는 불편함이 없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2]
나는 라틴 대륙의 멀고먼 정글에서 원주민 부족민과 함께 살았다. 그렇다고 카메라맨을 불러들이거나 기자를 동반한다거나 보건과 의료혜택을 입을 만큼 매스컴의 자료 등 파트너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는 않았다. 방문하는 국가 안팎을 위한 촬영 장비가 구축된 것도 아니었다. 때로는 내가 산책하던 거리가 자국의 교우들과 함께 기도하던 자리였다. 하지만 내가 지났던 그 길을 답습해 지나치는 한국인 관광객들은 너무나 만끽하던 중 그들에게 흥미롭고도 원색적인 걸음에서 민망한 에피소드를 남기는 모습도 보았다. 필자가 으레 이해하면서도 너무나 큰 격차를 남겼다. 그들은 태평양과 카리브 해협과 대서양을 건너온 이역만리의 땅에서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타·대륙의 이색풍미와 문화적 거리감에서 연출하며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서 절제 없이 촬영에 노출시킨 예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점차 수준이 나아지고 있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외계 세상과 타·민족과도 외양으로 가까워졌다는 말이 된다.
독일의 한 비평가는 말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① 내면의 생각을 음악으로 듣고, ② 글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며 ③ 건축하기 위해 종과 횡으로 직조하는 세 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마침내 창의적인 주제를 바탕으로 글의 줄거리를 연결하며 그에 부합하는 자신의 문체에 맞춰 텍스트를 완성하게 된다. 소설을 쓰는 일이나 학문하는 것도 사람의 일이라 삶의 언저리에서부터 구원의 중심에 이르도록 인접 학문과 더불어 구슬 꿰기의 실천이 필요하다. 이른바 잠재력을 개발하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자세이다.
가장 시간을 요구했던 작가는 페루의 바르가스 요사였다. 요사에게서 3년 정도의 시간이 정체되고 있었다. 그에 대한 글쓰기를 그만 둘까까지 숙고하게 만들었다. 그의 글은 초기 작품들 외에는 온통 도발적이었다. 내가 다루기에는 내 안에 있는 효소작용을 유지할만한 에너지도 헤쳐 나갈 정로
正路가 보이지 않았다. 무작정 덮어둠이 필요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아닌 작품 선택의 문제라면 진실로 건너뛰고 싶었다. 만약 필자가 처음에 바르가스 요사부터 시작해야했다면 이 글쓰기는 진전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 글을 구상하기 시작할 때는 브라질편이 포함되지 않았었다. 나의 비전이나 배치에 있어서 브라질은 포어권이었고 그 넓고 아름다운 대륙에서 아직껏 노벨문학상이 없는 환경이고 보면, 누구를 문호로서 갈채를 보내야할지 주관적으로 작정하기가 여간 힘든 문제가 아니었다. 남미 대륙의 쐐기형 지도를 펼쳐볼 때, 안데스산맥을 따라 남동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아르헨티나의 라플라타銀江 강변에서 문호들을 만나게 되지만, 정작 우측 전체의 브라질 쪽 아마존 유역에는 화살표를 표기할 만한 큰 영토가 비어 있었다. 거기 한 작가를 택하려면 한 인물에 대한 총체적 관심과 이해에서 비롯돼야 한다. 그가 누구든 간에 브라질 사람들 안에서도 연속성과 단절이 있기 마련이다.
[3]
가장 라틴아메리카다운 캐릭터는 무엇일까? 필자에게는 새롭게 부딪친 과제이기도 했다. 라틴 문예비평의 궤도에서 비껴갈 수 없는 수순이라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내게 돌아올 열매 같은 것은 애초에 사심조차 들지 않았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제국가와 인종·문화와 역사 공부에 대해서 촘촘히 살폈다. 브라질의 공화정 정치사와 사회적 빈곤의 상황, 근대적 발전상을 짚어야 했다. 세계적 수출품인 기호 농작물 코코아 산지와 커피 산업, 광물 등 경제적 변화를 새롭게 관찰해야만 했다. 라틴아메리카의 20세기 중반에 스며든 근·현대사는 좋건 싫건 긍·부정 사이에 쿠바혁명에 맞물려 있었다. 작가들과 저널리스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교분리의 유형으로 보수 신학을 연마했던 나로서는 그 사상적 대상이 무한한 거리감으로써 이해의 폭과 일탈이 멀고도 넓었다.
이러한 지적인 편력이 성직자인 나의 적성에 합당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런 연구가 가능할 수 있도록 최근에 경이로운 초청이 예비됐던 것이다. 필자는 그때의 초청을 브라질 편(조르지 아마두) 기행문과 후기에서 자상하게 새겨놓았다(p. 616- 617). 이 항목은 정확히 기록해두지 않으면 모래 위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다. 동시에 그 작가들이 속한 국가와 민족성에 관한 나의 학습 부족이 드러날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작가가 글을 쓸 당시의 초기 시점으로 돌아가 그때 그들이 처했던 사회·문화 안에서 그들을 복원시키는 작업에 머물며 그 강제성에 압도당해야 했다.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비평해야 했고, 그들이 산문 작가이든 시인이든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작품에 대한 곡진한 읽기가 점차 깊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그것은 허구의 작품이기 이전에 한 권의 역사서를 읽는 듯한 느낌으로서 특이한 경험의 독서였다. 거기에는 갖가지 인간사가 드러나고 있지만 라틴권의 모더니즘을 실험하는 거대한 뿌리를 발견하게 됐던 것이다. 한 마디로 작가의 기록 정신이었다. 구약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처럼 삶의 헛됨을 깨닫고서도, 비록 이 헛됨이 부산물처럼 내동댕이 칠지라도 그는 “많은 책들을 짓고 공부하더라도 몸을 피로하게 만들 뿐이니 지혜 추구의 경계로 삼으라”고 참회록을 썼다. 미래에 프랑스어를 모국어로 삼고서 음악계 주자로 헌신할 손주들과 혹은 딸 에스더가 5개 국어를 수월하게 구사할지라도 ‘에단’과 ‘야엘하선’이 이 책을 읽어낼 줄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것은 오롯이 사위 프랑수아 티소와 딸의 몫이라고 여긴다.
[4]
나는 이 서적을 청소년과 대학생들의 논술문 쓰기에 겨냥한다. 경미하나마 그들의 글쓰기 향상에 바쳐지기를 기원한다. 빛나는 논지 설정과 즐거운 글쓰기와 책읽기에 불꽃이 한층 더 점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대 중반의 젊은 날 향리의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서 가르치고 중·고교 국어교육 과정을 탐색해온 나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전체 12인의 작가 가운데 한 작가만 제외하고는 국내 네(4) 계간지에 문학기획 ‘특집’으로 실렸던 글들이다.
필자의 첫 가늠자 조준은 10월을 초점에 두고서 한국에서는 아직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했다. 2024년 10월 초순 세계시인협회가 주최하는 충북 수안보온천에서 문학세미나가 있었다. 나는 강사로 초청받은 대로 제목; 《왜 한국에서의 노벨문학상은 거리가 멀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강의 날짜가 오기 4일 전에 한국의 작가가 노벨상을 받게 된다는 발표가 뉴스에 나와 버렸다. 필자가 어떻게 대처했으면 좋았을까? 만감이 교차했다. 축하하기에 앞서 우선 제목부터 바꿔야만 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이런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부득이 강의제목과 내용의 일부를 다시 써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2023년 3월 29일 페루 언어아카데미와 ‘스페인 왕립아카데미’(RAE) 그리고 ‘스페인어 아카데미협회’(ASALE)가 합작한 제9차 스페인어 국제회의에서 다루어졌던 일이 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카디스’(Cadiz)에서 진행됐다. 컬렉션의 제목은 단행본 연구와 짧은 에세이로 구성됐다. 2004년 세르반테스의 고전 ‘돈키호테’ 1부 출판 400주년을 기념하면서부터 시작됐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지금까지 집필한 라틴계 문호(노벨문학수상자 6인 포함)들 12인 가운데 두 명만 빼고, 아홉의 명성이 여기 스페인어 아카데미에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출처: www.asale.org asociacion de academias de la lengua espanola) 물론 이를 염두에 두고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이것을 인터넷에서 읽은 것은 2023년 연말의 일이다.
이 책에서 언급되지 않은 한 문호는 쿠바의 ‘호세 마르티’이다. 나는 2006년 제2차 라틴아메리카 선교전략회의를 쿠바의 수도에서 개최할 때, 7일간 유했으나 J. 마르티의 문학기념관에는 들리지 못했다. 시간이 여의치 못했던 것이다. 참가자들이 회동했던 ‘바라데로 국제호텔’의 강당에서는 우리 주최측에다 찬송도 나지막하게 불러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출입국 경계태세를 거쳐 왕래하는 도로 역시 정해진 곳으로만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열대의 강물에서 들려오는 카누의 모터 소리는 활기차다. 나는 그 추진음을 부활절의 종소리로 듣는다. 카누는 살아있는 강의 움직임이다. 열대의 강물을 차고 나아가는 공동체의 교통수단이다. 적도의 우림지대를 넘어 정글 속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단단한 카누는 구원을 약속하며 찾아오시는 성자의 은유와도 같다. 엠베라Embera 부족민의 조상들은 스페인의 총칼 앞에서도 인간적인 항거와 자연에의 적응력을 전수해 주었다. 나는 그들만의 삶의 도전이자 이동수단이며 생계 방식인 카누를 조명해 보고 싶었다. 이전의 작품집『풀잎 속의 잉카』에서도 표현했듯이 본서에서도 라틴 인디오의 열정이 그들의 영혼에서 묻어난다.
이번 6집은‘기쁜 망고’로 표현해 보고자 했다. 그렇지만 제 5집의 제목을『슬픈 망고』로 펴내었기에 너무 목적 지향이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것이『카누에 오신 성자』로 정하게 된 배경이다. 그러기에 이번 선집은‘슬픈 망고’에 관한 소재의 변화요 회복이다. 푸름과 태양의 주황빛이 어우러진 희망찬 망고로써 독자들을 정글에 머물게 하는 자력磁力을 선보이게 될지도 모른다.
망고꽃을 본 사람이라면 그림이 그려지겠지만 그 꽃은 제왕의 모습을 갖고 있다. 원주민에게 망고는 한 끼의 요기이며 탈문명지대에서의 위로이다. 위로란 심신의 안정 상태를 의미한다. 망고의 자생 환경과 거기 거친 터전을 딛고 개척하며 의식주를 꾸리는 인디오의 생활상을 모르고서, 무작정“망고 맛이 좋다”하면서 먹기만 한다면 이러한 먹음의 행위는 야만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의 산행에서부터 명산의 등정에 관한 체험 등 삶의 철학을 담고 시적 파토스를 노래한다. 그리고 팬데믹의 코로나19를 다루는 시가 몇 편 나온다. 코로나는 일상에서의 좋은 단어인‘대면’(Encounter)이라는 말을 아주 이상한 언어로 바꾸어놓은 본체이다. 여기엔 정부도 정치도 한 몫을 했다. 나는 몇 편에서 이른 봄의 새싹을 바라보며 얼음 속에서 박차고 나오는 꽃을 대면하는 형식으로 감염 바이러스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고 있다.
끝으로 대학원 강단에서 선교와 문화인류학을 지도한 주제로 접근하고자 했다.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원초의식은 지속되는 정서로 나타난다. 본 작품집의 주제는 페스티벌 의식과도 같다. 시의 독자들은 열대 정글에서 풋풋하게 익어가는 <기쁜 망고>의 정서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다섯 만남(5부)으로 해설을 써 주신 한국크리스천문협 최세균 회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이국적인 이미지에 대한 통찰과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산정에 도달하는 시정詩情을 필력으로 풀어내기란 결코 녹록지만 않았을 것이다. 더불어 부족한 이를 위해서 여섯 권의 선집을 발행한 예영커뮤나케이션과 금번 카리타스 출판사에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원한다. - 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