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 (시인)
: 은자(隱者)는 외진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잣거리에도 스며들고 구중궁궐 안으로 몸을 숨기기도 한다. 동방삭이 그랬다. 나는 같은 이유로 역사의 광장과 사색의 광장이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부희령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내 생각이 영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미시와 거시 세계의 딱 중간에 내가 있는 것처럼 꿈과 현실의 문제를 뒤섞어놓은 뒤 읽는 이로 하여금 세계관을 찾게 만드는 그의 소설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문학이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전망 좋은 방」의 끝무렵, 할머니의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은 말간 얼굴”에 담긴 세월의 무게 역시 우리가 찾아 나서야 할 몫이다. 이렇게 결론짓고 보니 소설이 시보다 더 복잡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시는 거듭 읽어야 한다는 옛말은 허언이고 외려 소설을 거듭 읽어야 한다.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매 순간 새롭게 발견하다 보면 마침내 독자는 한 편의 소설을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부희령은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을 작가로 만들 심사인지도 모르겠다. 내 유년의 경험상 들판 밖의 풍경은 모두 뚝방길이었다. 그러나 같은 뚝길에 서 있더라도 들판을 건넌 이와 그렇지 않은 심사는 사뭇 다르다. 이제 들길로 가보자. “미래는 결코 경험할 수 없었고 현재는 과거에 먹혀버린”(「마중」) 운명 앞에서 어쨌거나 우리는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AI? 글쎄. 인류가 생존하는 한 걱정거리는 있을 것이고, 그게 이어지는 한 고뇌는 있을 것이고, 근심 있는 곳에 그 부산물로 광석은 맺힐 것이고, 그럴수록 부희령의 연마는 깊어질 것이고, 아, 이렇게 보석은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