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솔아 (소설가, 시인)
: 오래 잊고 있던 나의 비밀 친구를 떠올렸다. 나의 비밀 친구는 어린 시절에만 존재했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다. 그래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래도 그 친구를 오래 그리워했다. 언젠가부터 내게 그런 친구가 있었다는 걸 까맣게 잊고 살아왔는데, 그리워했다는 사실조차 완전히 잊어버렸는데, 이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친구가 몸을 얻어 내 앞에 환생해 있었다.
박연준의 《여름과 루비》에서는 ‘첫 순간’들이 무수히 쏟아진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황홀한 밤 같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위 날을 손에” 쥐어본 순간. 그 차가움을 만져본 순간. “계란을 쥐듯”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피아노 건반을 처음으로 눌러본 순간. 개미를 지켜보며 살아 있는 것이 살아 있다는 것 때문에 두려울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어떤 두려움들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이 처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섬세하고, 강렬하다. 이 처음들은 찰나이자 영원과 다름없다. 거침없이 살을 파고들어 중심을 꿰뚫으니까. 온몸에 각인되니까. 박연준은 단지 처음들을 기억해내고 재현하지 않는다. 처음을 하나하나 낱낱이 되살려놓는, 그녀만의 소생술이다. 박연준의 소설은 너무나도 살아 있다. 읽는 내내 오감이 곤두서 몸이 열리고 이야기들이 내 실핏줄을 타고 흘러다녔다. 아주 비밀스럽고 친밀한 교류를 한 것처럼.
― 임솔아(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