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의 역사왜곡서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역사>를 썼고,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1세기에 <게르마니아>를 썼다. 또한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에 <사기>를 저술했으며, 반고는 1세기에 <한서>를 남겼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서들이 모두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로마, 중국은 고대 문명이 찬란했던 지역이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우리보다 역사가 짧은 일본만 해도 8세기 초반의 역사서 <일본서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럼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 최초의 역사서는 고려 중기인 1145년에 간행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이나마 초간본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판본은 조선 시대인 16세기 초에 재간행된 것이다.
그럼 그 이전에는 역사서가 아예 없었던가? 그건 아니다. <삼국사기>의 주인공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각각 역사서를 편찬했다. 고구려에는 <유기(留記)>와 <신집(新集)>이라는 역사서가 있었고, 백제는 <서기(書記)>(4세기), 신라는 <국사(國史)>(6세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다. 그러
나 이 문헌들은 이름만 전해질 뿐 모두 전하지 않는다.
고대의 사서들이 유실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숱한 전란으로 없어진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유달리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탓에 우리는 역사서는커녕 문화재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우리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새 왕조를 연 다음에는 전 왕조의 역사를 공식 사서로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중국의 경우 이 원칙은 아주 철저하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이후, 즉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다. <화랑세기>, <고승전>, <제왕연대력> 등 특정한 분야의 비공식 역사서들만 있을 뿐이다.
이는 신라의 지배층 스스로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왕조로 보지 않고 중국의 종속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지위였으니 독자적인 역사서를 서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삼국에 관한 역사는 수백 년이 지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리되는데, 그것도 자주적인 입장이 아니라 지극히 사대적인 관점에서 서술된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유학자와 승려가 쓴 역사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경주 김씨로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오늘날 그는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이름이 전해지지만, 당시 그가 명성을 떨친 것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로 때문...
김부식의 역사왜곡서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리스의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5세기에 <역사>를 썼고,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1세기에 <게르마니아>를 썼다. 또한 중국 한나라의 사마천은 기원전 1세기에 <사기>를 저술했으며, 반고는 1세기에 <한서>를 남겼다. 중요한 것은 이 역사서들이 모두 200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로마, 중국은 고대 문명이 찬란했던 지역이라서 그런 게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 우리보다 역사가 짧은 일본만 해도 8세기 초반의 역사서 <일본서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럼 우리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지금까지 전하는 우리 최초의 역사서는 고려 중기인 1145년에 간행된 <삼국사기(三國史記)>이다. 이나마 초간본은 없어졌고 지금 전하는 판본은 조선 시대인 16세기 초에 재간행된 것이다.
그럼 그 이전에는 역사서가 아예 없었던가? 그건 아니다. <삼국사기>의 주인공들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각각 역사서를 편찬했다. 고구려에는 <유기(留記)>와 <신집(新集)>이라는 역사서가 있었고, 백제는 <서기(書記)>(4세기), 신라는 <국사(國史)>(6세기)라는 역사서를 편찬했다. 그러
나 이 문헌들은 이름만 전해질 뿐 모두 전하지 않는다.
고대의 사서들이 유실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숱한 전란으로 없어진 것들이 많다는 점이다. 유달리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탓에 우리는 역사서는커녕 문화재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우리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새 왕조를 연 다음에는 전 왕조의 역사를 공식 사서로 정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중국의 경우 이 원칙은 아주 철저하다). 하지만 삼국을 통일한 이후, 즉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는 공식 역사서를 편찬하지 않았다. <화랑세기>, <고승전>, <제왕연대력> 등 특정한 분야의 비공식 역사서들만 있을 뿐이다.
이는 신라의 지배층 스스로 신라를 고구려와 백제를 통합한 왕조로 보지 않고 중국의 종속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 지방과 같은 지위였으니 독자적인 역사서를 서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삼국에 관한 역사는 수백 년이 지난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정리되는데, 그것도 자주적인 입장이 아니라 지극히 사대적인 관점에서 서술된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이다.
유학자와 승려가 쓴 역사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은 경주 김씨로 신라 왕실의 후손이다. 오늘날 그는 <삼국사기>의 편찬자로 이름이 전해지지만, 당시 그가 명성을 떨친 것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로 때문이었다. 1135년 묘청이 서경(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부식은 이를 진압하기 위한 관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다(무신이 천대받았던 고려 중기까지는 무관이 할 일도 문관이 맡았다).
1년이 넘도록 버틴 반란군을 정벌하고 돌아온 김부식은 묘청과 같은 불교 세력이 북벌과 칭제건원(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따로이 쓴다는 뜻)까지 주장한 데 충격을 받고, 유교 사상을 중흥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된다.
때마침 고대 삼국에 관한 역사서를 편찬하라는 왕명이 떨어지자 그는 이것을 기회로 여긴다. 당시 그는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고 '고독한 1인자'로 외로운 노년을 보내고 있던 터라 이 기회가 특히 반가웠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편찬된 <삼국사기>는 사마천이 확립한 이후 정사(正史)의 기본 체재가 된 기전체(紀傳體, 본기, 열전, 표, 지로 구성되는 역사 서술 방식)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본기(역대 왕들의 치적) 28권, 지(문물, 제도 등의 기록) 9권, 표(연표) 3권, 열전(인물에 관한 기록) 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었다(물론 오늘날 말하는 책의 권수와는 다르니까 분량이 엄청나다고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요즘의 책으로 보면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묶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 가운데 본기는 고구려 본기가 10권, 백제 본기가 6권, 신라 본기가 12권이다. <삼국사기>보다 130여 년 뒤에 나온 <삼국유사>는 일연(一然, 1206-89)이라는 승려가 편찬했다.
어렸을 때부터 절에서 공부했고 열세 살에 출가한 일연은 젊은 시절에 이미 높은 학문으로 여러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만년에는 왕의 스승격인 국존(國尊)에까지 올랐으며, <삼국유사>도 그 무렵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 5권으로 된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 비해 체계적인 성격은 덜하지만, 야사와 설화, 민담 등도 많이 수록되어 있어 훨씬 흥미롭다. 일연은 젊은 시절부터 모아 온 많은 자료들을 두루 활용하기 위해 자유로운 형식으로 책을 구성했다. 특히 이 책에만 실린 신라 시대의 향가 14수는 우리 고대 문학 연구의 대단히 귀중한 자료이다(현재 전해지는 향가는 <균역전>에 실린 11수를 포함하여 25수밖에 없다).
역사서로서의 가치
<삼국사기>는 최초의 정사답게 사료의 엄정한 선택과 객관적인 서술을 기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돋보인다. 게다가 역사의 주요한 장면마다 평론의 부분을 두어 지은이의 사관을 피력하고, 고대 삼국을 모두 '우리'라고 부름으로써 하나의 한반도 역사를 지향하고 있다.
특히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연도는 물론 해당 월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고대 삼국에 관한 1차 자료가 전무한 실정에서 당대의 연혁을 분명히 밝혀 준다. 따라서 싫든 좋든 고대 삼국에 관한 역사적 정보는 우선적으로 <삼국사기>에서 얻을 수밖에 없다(<삼국유사>의 서술도 <삼국사기>에 의존하고 있는 바가 크다).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배우는 국사 교과서에서도 삼국 시대 부분은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고려 시대가 까마득한 옛날이듯이, 김부식의 시대에도 삼국 시대는 까마득
한 옛날이었다. 그러므로 김부식도 역시 쓸 만한 사료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는 <삼국사기>의 권두에 실린 임금(고려 인종)께 올리는 글에서 인종의 입을 빌려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다.
`중국 한나라 역사서나 당나라 역사서에 다 삼국의 열전이 있지만, 그 사서들은 모두 우리 역사에 관 한 부분은 소홀히 했고, 삼국의 고기(古記)는 글이 거칠고 졸렬하고 오류가 많아 후세에 교훈을 보이지 못했으니 마땅히 새로운 역사를 완성해야 한다.`
비록 그는 마땅한 사료가 없음을 얘기하고 있지만, 뒤집어 보면 이 부분은 그가 어떤 사료를 참조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즉 첫째는 중국측 역사서에 나오는 한반도 부분이었고, 둘째는 국내에 비체계적으로 전하는 여러 가지 기록들이다. 이런 빈약한 자료를 가공하여 방대한 정사를 편찬한 김부식의 솜씨는 놀라운 것이었다.
한편 일연은 원래 <삼국사기>에 누락된 불교적인 요소들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제3권에는 흥법(興法, '법'이란 불법을 뜻한다)이라는 제목으로 역대 고승의 행적과 불상, 탑 등의 유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중요성은 그런 부분보다는 <삼국사기>에 없는 우리 역사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단군과 고조선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커다란 특징이다. <삼국사기>에는 "일찍이 조선의 유민들이 이곳(서라벌)에 와서 각 계곡들로 흩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었다."는 단 한 문장만으로 삼국 이전의 역사를 마무리짓고 넘어간 데 비해 <삼국유사>는 고조선과 삼한, 낙랑과 대방, 말갈, 동부여 등 상고 시대의 역사까지 서술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더욱 늘린 것이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우리 역사는 '반만 년'은커녕 2000년도 채 못 되었을 것이다.
역사서로서의 한계
중국 최초의 정사인 사마천의 <사기>처럼 우리 최초의 정사 <삼국사기>도 모든 면에서 훌륭한 역사서의 모범을 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삼국사기>는 그 가치보다 더 큰 단점을 지닌다.
김부식은 이 책이 유교 사관을 확립한 모범적인 저술로 남기를 바랐으나 그의 사후 20년도 채 못 되어서 <삼국사기>는 다른 학자들의 숱한 비판을 받았다.
우선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주의와 사대주의에 치중해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라지만, 고대 삼국 중 신라만을 정통적인 국가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다.
그 자체로만 보면 넘어갈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 역사 왜곡이 개재해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이다. 김부식 자신도 알고 있었던 단군과 고조선 사항을 무단으로 삭제한 것이라든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명백히 밝혀진 것과는 달리 신라의 기원을 고구려보다 먼저로 잡고 있는 게 바로 그런 점들이다.
게다가 그는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설화나 민담을 누락시키거나 심지어 유교적 사관에 맞도록 고치기까지 했다. 오늘날 같으면 거의 '범죄'에 해당할 만한 역사 왜곡이다.
신라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니 자연히 백제와 고구려를 비난하게 된다. 백제 본기 뒷부분에 실린 김부식의 논평을 보자.
`백제 말기에는 무도한 짓이 많았고, 또 대대로 신라의 원수가 되어 고구려와 손잡고 신라를 침범했으니, 이웃과 잘 지내는 것이 국가의 보배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더욱이 당나라의 천자가 그 원한을 풀도록 명했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명을 어기어 대국(중국)에 죄를 얻었으니 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를 괴롭히고 중국의 명을 듣지 않았으니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신라 중심주의와 사대주의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부분이다. 원래 중국의 사서들은 변방의 다른 '오랑캐' 나라들과 맺은 외교 관계를 모두 중국에 조공했다고 기록하는데, 이런 식의 역사 서술을 이른바 '춘추 필법'이라 한다.
춘추 필법이란 공자가 지은 역사서 <춘추>에서 비롯된 말로서, 중국에 치욕적인 사실은 모두 왜곡하고 수정하는 것이 인정된다. 이렇게 보면 <삼국사기>는 역사관만이 아니라 집필 방식까지 사대적이었던 셈이다.
그럼 단군과 고조선을 기록한 <삼국유사>는 이런 단점을 갖지 않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역사서일까? 불행히도 아니다. 물론 <삼국유사>는 <삼국사기>보다 진일보한 사관을 보여 주고는 있지만, 역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삼국유사>에 단군과 고조선이 기록된 이유는 이 책이 집필된 배경을 알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13세기 후반은 고려가 몽골의 속국으로 전락한 시대이다. 따라서 일연은 이민족의 지배에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늘린 것이다.
이를테면 "봐라, 우리는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다." 하는 식이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서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일연 자신도 수천 년 전의 신화를 역사라고 기록하기에는 좀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다.
`제왕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령을 얻고 도록(예언서)을 받게 된다. 때문에 보통 사람과는 다른 점이 있게 마련이다.……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러운 데서 나왔다는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으랴.`
그는 이렇게 '괴이한 것'을 정당화시켜 놓고 나서 단군 이야기로 접어든다. 그리고 연표에 해당하는 왕력에서는 <삼국사기>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건국자인 박혁거세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에 우리 역사의 유구함과 자주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공의 사실을 현실로 위조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장한다면 진짜 역사는 오히려 흙 속에 파묻혀 버릴 것이다. 결국 <삼국사기>는 사대주의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삼국유사>는 사대주의를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마찬가지의 역사 왜곡을 빚고 말았다. -
남경태(전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