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배신과 변신 (1)
……이 사건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비난에 직면한 정부는 서둘러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고, 그 결과 속칭 연장질을 한 경우 피해자의 상처가 어느 정도냐에 상관없이 중범죄로 취급되어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기를 맞대고 겨루는 싸움은 오직 가상현실게임에서만 가능한 일이 되었다. 암흑가 조직들의 무분별한 연장질이 가상현실게임의 중흥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다소 황당한 주장은 이를 근거로…….
- 2101년에 발간된 작자 미상의 초보자 안내서, <가상현실게임 히코 제대로 즐기기>에서 발췌 -
* * *
“이른 시일 안에 정리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보스는 인상을 찡그리며 투덜댔다.
“나도 그 새끼 생각만 하면 골치가 지끈지끈해. 아니, 이가 북북 갈려. 이번 일만 해도 그렇고.”
그놈은 채무자를 다독여(?) 빚을 받아내기는커녕 차용증서를 찢어버렸다.
그것도 모자라 조직에서 준 활동비와 자기 돈까지 탈탈 털어 치료비에 보태라며 건네주고는 걸어서 돌아왔다.
<술이나 도박, 여자에 빠져 그런 거라면 옥수수를 몽땅 털어서라도 받아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의 병원비 때문에 그런 거고, 아직 다 낫지도 않았더군요. 게다가 아직 어린 딸도 있고요.>
그놈은 당당하게, 정확히 표현하면 아주 뻔뻔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었다.
이제 그 빚을 받아낼 길은 없다. 차용증서가 사라졌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물론 그놈 몰래 다른 조직원을 보내 아내와 딸을 좀 어루만져 주면 받아내는 일 자체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란 없는 법이다. 만약 그놈이 사실을 알게 되면 그때는 정말 난리 굿판이 벌어질 게 틀림없다.
과거 경험상 그럴 때의 놈은 위아래 개념을 아예 상실해 버리는 성격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보스조차 놈을 제어할 수 없다.
“아니, 제 놈이 의적이야, 뭐야! 건달이면 건달답게 놀아야지,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느니 뭐니, 개소리만 주절대니.”
계속 투덜대는 폼이 보스도 쌓인 게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고 버리기는 정말 아깝고.”
도대체 대가리 속에 뭐가 들었는지 하는 짓마다 염장질 투성이인 놈이지만 실력만은 정말 대단하다.
혼자서 몇 명을 상대하든 기죽는 일도 없고, 더 나아가 깨지고 실려 오기는커녕 맞지도 않는다. 몸이 워낙 빠른 데다 누구든 단 한 방이면 끝나기에 ‘번개망치’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그렇지만 놈이 조직에 입히는 손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값비싼 양주를 단숨에 털어 넣은 보스의 표정은 강제로 똥물을 마신 사람과 비슷해 보였다.
“그 새끼가 구역 관리에만 신경 써주면 정말 좋을 텐데…….”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아시잖습니까. 돌아가는 사정을 좀 알고 난 후부터 놈은 여기저기 안 쑤시고 다니는 데가 없습니다.”
그 덕분에 조직의 월간 수입이 5퍼센트나 줄어버렸다.
“정리해야 합니다, 보스. 더구나 지금 준비 중인 가상현실게임 작업장 운영 방침만 생각해 봐도 놈의 반발을 피할 수 없습니다. 종합적으로 보면 손해가 더 큽니다.”
한동안 갈등하던 보스가 마침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꼴리는 대로 해봐!”
* * *
밤하늘이 쏟아붓는 별빛은 내 얼굴을 시원하면서도 포근하게 해주었고, 더불어 눈까지 황홀하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이런 대도시에서 별을 보려 했다가는 미친놈 취급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강력하게 시행된 환경회복 정책의 결과, 이젠 이 번화한 도시 한 가운데서도 맑은 하늘과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게 된 거다.
“형님, 천문학자 하실 생각이우?”
별빛에 취해 멍해진 귓속으로 길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되물었다.
“뭔 소리냐?”
“밤만 되면 별 보면서 정신을 못 차리니 하는 소리요. 그러다 언젠간 목뼈 부러질 거요.”
그제야 시선을 내린 나는 길수를 보며 씨익 웃음을 흘렸다.
통합학교를 중퇴한 길수는 다른 애들의 경우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조직에 들어왔다. 성격도 그만큼 여린 구석이 많다.
물론 학교 때 강동연합 일진 짱이던 녀석을 아는 애들이라면 입에 거품을 물며 나를 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그놈들 기준이고, 내가 보기에 길수 녀석은 영락없는 애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가능한 한 녀석을 챙겨주었다. 그래서인지 녀석은 심지어 우리 조직 애들도 슬슬 피하는 내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 됐다.
때로는 그게 지나쳐 지금처럼 좀 건방지기도 하다. 그렇지만 보통은 귀엽게 봐줄 수 있는 수준이니 상관없다.
별 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니 이번 임무에 동원된 애들은 나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으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녀석들은 그게 결코 의식적인 게 아니라고 주장하려는 듯 몇 명씩 모여서 두런대고 있었다.
항상 봐 왔던 모습이니 새삼스러울 건 없지만 솔직히 기분은 좀 나쁘다. 내가 성인군자인 건 아니니까.
하지만 굳이 탓하고 싶지도 않다. 내 얼굴은, 나조차도 가끔 거울을 보면서 흠칫 놀랄 만큼 험악하게 생겨 먹었으니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소린데, 그러고 보면 돌아가신 엄마도 참 대단하신 분이다. 아니, 차라리 미스터리다.
생전의 아버지를 찍은 영상을 보면 내 외모는 아버지의 복사판이다. 심지어 아버지의 어릴 때 사진을 보여주며 나라고 말해도 다 믿을 정도다.
반대로 엄마는 웨딩 잡지 모델을 할 정도의 쭉쭉빵빵 미인이셨다. 그러니 두 분이 어떻게 연결되셨는지는, 아무리 외모보다 사랑이라지만 미스터리일 수밖에 없는 거지.
길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녀석의 손에 이끌려 나온 걸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아주 잘 빠진, 그래서 더 위험해 보이는 단검이었다. 팔뚝에라도 숨길 만큼 작지만, 누군가의 목을 따기에는 충분한 연장!
“그게 뭐냐?”
녀석은 잘 갈린 칼날에 반사되는 달빛에 한껏 매혹된 얼굴로 대답했다.
“별 보다 눈이라도 먼 거유? 단검이지 뭐요.”
“그걸 왜 갖고 다니느냐고 묻는 거다, 지금!”
주변 녀석들이 움찔하는 걸로 봐서는 나도 모르게 음성에 기운을 실은 모양이다.
하지만 길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녀석은 오히려 빙긋 웃기까지 했다.
“갖고 다니는 건 죄가 아뇨, 형님. 그러니 걱정 마시우.”
“들고 다니면 쓰고 싶어지는 게 연장이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더 그럴 거고. 그럼 넌 끝장이야, 이 자식아.”
“형님은 자꾸 나를 애 취급하시는데, 나도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겪을 만큼 다 겪은 놈요!”
안 그래도 귀여운 녀석이 뺨을 씰룩대며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자니 더 강하게 나가기도 애매했다.
“안 쓸 거면 뭐 하러 들고 다니냐? 무겁게스리.”
내 음성에서 냉기가 사라지자, 녀석의 표정도 금방 풀어졌다.
“멋지잖우. 이 잘 빠진 몸매 하며, 특히 여기를 좀 봐요.”
녀석이 내미는 단검을 받아 들고 보니 정말 좋긴 좋은 물건이다.
녀석이 가리킨 손마개 부분의 세공이 특히 멋졌다. 어느 솜씨 좋은 인간이 정성을 다 바쳐 만든 거라는 쯤은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좋은 물건을 보면 갖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니 더 말하기도 좀 그렇다. 그래도 단검을 돌려주며 기어코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도 조심해, 인마. 까딱 잘못하면 새 되는 거야.”
“원 참! 걱정도 팔자유. 노인네 티 내는 것도 아니고…….”
녀석은 고작 세 살 차이인 나를 아예 늙은이 취급했다.
“뭐야, 이 자식아?”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장난스레 피하는 동작을 취한 녀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형님은 정말 게임 안 하실라우?”
한두 번 들은 소리가 아니기에 우선 인상부터 찡그렸다.
“그딴 걸 뭐 하러? 너는 그따위 가짜 세상에서 살 만큼 세상살이가 널널한지 몰라도 난 아니다. 현실만으로도 푹푹해 죽겠는데 환상 따위에 빠질 이유가 없다는 소리야.”
“원 참! 뭐가 그리 뻑뻑하우. 눈치를 보아하니 형님도 이게 마음에 드는 모양인데, 가상현실게임을 하면 이런 건 애들 장난감이우. 어디 그뿐이우?”
현실에서는 고작 가지고 있는 걸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만 게임에서는 연장질을 아무리 해도 문제가 없단다.
“아니, 잘할수록 영웅이우. 형님 정도면 무투가만 해도 되지만, 그래도 뽀대 작살인 연장 들고 호령하는 재미가 작살이우.”
“실없는 소리 관둬라. 용태 형 온다.”
이번 작업을 지휘하는 용태 형이 다가왔다.
“자, 그만들 떠들고 이제 시작하자.”
흩어져 있던 애들 전부가 다가서며 용태 형을 향해 구십 도로 허리를 꺾었다.
“예, 형님!”
골목 바깥을 오가는 행인들을 의식해 목소리를 낮춘 것도 그렇고, 그 속에 담긴 절도 또한 제법이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양아치다. 이 중에 제대로 된 건달은 나를 빼면 아무도 없다고 봐도 된다.
“2조는 민수 지휘하에 뒷문을 막고, 3조는 한영이를 따라 로비를 장악해라. 1조는 나를 따라 놈들을 친다.”
용태 형이 어느 조에도 속하지 않은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건물 주변을 돌며……”
“튀는 놈을 잡아라! 귀에 딱지 앉겠네.”
그 간단한 걸 잊을까.
“바깥은 걱정 말고 일이나 잘 보쇼. 그보다 그놈이 아주 질기다고 소문났던데, 난 빨리 끝날지가 더 걱정이요.”
“그건 걱정 마라.”
하긴 걱정해야 한다면 그건 용태 형 쪽이 아니라 오늘의 작업 목표인 장 사장 쪽이어야 한다. 사람을 상처 하나 없이 골병들게 만드는 용태 형의 고문 솜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니까.
“자, 가자.”
“예, 형님!”
용태 형을 선두로 애들이 모두 사라진 후, 나는 건물을 에워싸고 있는 골목길을 천천히 걸으며 다시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절대 별 보려고 그런 거 아니다. 우리 애들을 피하려는 그 어떤 녀석이든, 건물을 탈출하려면 창문으로 뛰어내려야 할 테니까.
건물을 세 바퀴 돌았으니 한 십 분쯤 지났을까.
용태 형과 애들이 뒷문을 통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태도가 좀 이상하다.
저건 작업을 끝낸 후의 당당한 모습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뭔가에 엄청 쫓기는 다급한 모습이 틀림없다.
나는 얼른 그들을 향해 뛰었다.
‘장 사장 이 새끼가 준비 좀 한 모양이군. 하지만 잘못 생각했어. 내가 있는 한 무슨 준비를 했든 안 한 거나 똑같다는 걸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
나는 결심과 동시에 이미 일곱 걸음을 뛰었다.
사람들이 심심해서 나를 번개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바로 이 초인적인 순발력 때문인 거다.
용태 형 일행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그러나 나는 여덟 번째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얼굴과 앞가슴에 피를 잔뜩 뒤집어쓴 길수 녀석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 새끼가 그 새끼 담갔다. 튀어!”
용태 형은 다급한 와중에도 아주 간결하고 조리 있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 * *
나는 팔짱을 끼고 사무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길수 녀석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성질 더러운 보스에게 복날 개 맞듯 얻어터진 길수 녀석은 장 사장의 피와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됐다. 그럼에도 기절하지 않은 걸 칭찬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하긴 녀석도 양심이 있으면 기절할 염치도 없겠지.’
얘기를 들어보니 길수는 장 사장 애들의 다구리에 걸려 몇 대 얻어터진 모양이다.
그 순간, 강동연합 짱이라는 경력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녀석은 꼭지가 돌고 말았다. 다음 순서는 물론 내 주의 사항을 개소리로 여기는 것이었다.
단검을 꺼내 든 녀석은 엉뚱하게도 자기를 다구리 친 놈들이 아닌 장 사장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보스는 보스끼리 놀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뭐라나.
보스는 보스끼리 어쩌고 하는 소리 때문에 우리 보스가 더 열이 받았다는 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거다.
하여간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연장질이 일어난 것이다.
사무실은 고요한 침묵과, 그것을 뛰어넘는 당혹감이 지배했다. 보스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고, 문환이 형님은 그 옆 소파에 앉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문환이 형님이 고개를 쳐들었다.
길수 녀석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문환이 형님의 입술에 꽂혔다.
그는 조직 내에서 유일하게 대학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다. 졸업은 못 했지만, 외국물도 좀 먹어봤을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 주먹은 별로지만 그 머리를 이용해 넘버 투 자리를 차지한, 이를테면 삼국지의 제갈공명쯤 되겠다.
“해결책이 없는 건 아닙니다.”
모두의 눈이 둥그렇게 확대됐다.
길수 녀석은 자기가 맞은 숫자에다 이자를 붙이겠다는 생각으로, 한두 번도 아니고 자그마치 아홉 번이나 칼침을 놨다.
당근 장 사장은 걸레가 됐다. 현장에 있던 용태 형이 언뜻 보기에 혼수상태는 기본이고, 어쩌면 아예 밥숟가락을 놔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냥 담근 것도 아니고 사태가 이 지경인데 그걸 해결할 수 있단다.
“그, 그게 뭐냐?”
“우선 길수를 가능한 한 빨리 자수 시킵니다.”
퉁퉁 부은 채로도 실낱같은 기대를 담고 있던 길수의 두 눈이 감기며 고개가 툭 떨어졌다.
자수한다 해도, 장 사장이 목숨 줄을 잡고 있어도 5년이다. 죽기라도 하면 10년 이상, 어쩌면 무기형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기대에 차 있기는 마찬가지이던 보스가 고개를 흔들었다. 문환이 형님은 그런 보스를 다시 한번 수렁에서 건져냈다.
“평소 닦아놓은 길이 몇 개 있습니다. 관할서와 지검에 영향력이 큰 분들이니 도움이 될 겁니다.”
“그걸로 될까?”
보스는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다.